돈이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몰린다. 그곳의 이권에는 권력자들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기 마련이다.
1999년 3월30일 중부권 물류기지 현지 취재를 하면서 이상한 것들이 내 눈에 띄었다. 빼곡하게 심어져 있던 나무들, 사람이 살지 않는 가건물, 분명 누군가 보상을 받기 위해 심어놓거나 설치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나는 이런 것들을 빼놓지 않고 수첩에 기록했다.
그리고 이런 석연찮은 의문의 실체를 파헤쳐 보기로 했다. 서울에 올라온 후 의문점을 피라미드형 도표로 만들었다. 경찰이나 검찰에서 조직사건을 일망타진한 후 몸통부터 깃털까지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조직도'를 그리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렸다. 정치인들, 지방자치단체, 지방 토호들, 언론 등이 모두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며칠 후 주민 대표에게만 알리고 조용히 충남 명학리를 다시 찾았다. 마을 주민들의 도움을 얻어 ‘이권’에 개입한 인사들을 추적해 나갔다. 해당지역의 토지 소유자를 파악한 후 문제의 토지와 가건물 소유자를 대조해 나갔다. 그랬더니 비로소 베일에 가려졌던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김대중 정부의 공동 파트너였던 자민련의 실세 부총재, 지역구 국회의원, 충남도지사 계원, 면사무소와 경찰공무원의 이권개입 실체가 드러났다. 이들이 주민들의 반발을 무마시키고 명학지구 건설을 강행하려던 이유가 있었다.
이들은 내륙화물기지 건설과 관련하여 건설업체와 레미콘업체를 소유한 지역구 국회의원이거나 건설정보를 입수한 공무원 등 권력층과 친분있는 사람들이었다. 지역 경찰 간부도 있었다. 만약 명학지구에 내륙화물기지 건설이 무산될 경우 사업참여가 불투명하고, 보상금을 목적으로 조성한 묘목재배가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임대차 계약에 따른 막대한 손해가 예상돼 주민들의 반대 목소리를 외면하고 필사적으로 유치를 주장했던 것이다.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의 경우 내륙화물기지 입지가 확정되기 전에 지역구 당원대회에서 내륙화물기지가 충남 명학리로 확정되었다며 “내가 돈을 좀 버는데 왜 지역주민들이 반대하는지 모르겠다”고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나는 4월7일자에 이들의 소속과 실명 그리고 직위를 폭로했다. 그러자 기사에 거명됐던 자민련 의원(충남 연기)과 충남도청 공무원, 지역주민 등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대부분 기사보도에 대한 반론보다는 물류신문의 간부진이나 취재기자들이 어느 지역 출신인지 충남북지역과 어떤 이해관계가 있는지를 따져묻거나 계속 문제를 제기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기사에 거명된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은 회사로 전화해서 협박에 가까운 욕설을 해대는가 하면, 당시 자민련 당원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폭언과 함께 금방 쳐들어 올 듯 난리를 쳤다. 또 이름을 밝히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전화가 빗발쳤다.
보도 이후 관련 공무원들에 대한 감찰조사도 시작됐다. 이런 일련의 상황들은 필자의 취재 보도가 그만큼 반향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름도 없는 작은 전문지, 그것도 창간된 지 얼마되지 않는 신생 매체에서 권력자들의 실상이 폭로되면서 이들이 받는 충격은 더욱 컸을 것이다.
나는 기자수첩을 통해 “본지에는 충남북에 연고를 두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또한 지역주의를 앞세워 편집방향을 정하거나 기사를 보도하지도 않는다. 또 어떠한 압력이나 협박성 엄포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둔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국책연구기관의 엉터리용역에 이어 명학지구의 이권개입의 실상이 보도되자 1위 후보지인 ‘충남 연기군 명학리’에 대한 회의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주민들도 연이어 내가 쓴 기사를 스크랩해서 자민련 당사 앞에서 시위를 했다. 정치권에서도 새로운 이슈로 부각했고, 국회 상임위에서는 국책사업으로 추진되던 ‘중부권 내륙화물기지’ 건설사업이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다.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물류신문 보도 이후 정책심의위원회를 열고 '중부권 내륙화물기지 문제'를 당론으로 채택했고,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문제 제기를 하겠다고 밝혔다. 권력자들의 이권개입 폭로는 국책사업으로 추친되던 '중부권 물류기지' 사업의 큰 전환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