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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사람들

끝까지 제자들 살린 단원고 ‘유니나 선생님’

by 사건추적 2020. 12. 25.


경남 진주가 고향인 유니나 교사(29)는 2009년 진주 경상대학교 사범대학 일어교육과를 졸업했다.

 

임용고시에 합격한 후인 2011년 안산 단원고에 발령받았다. 교사 첫 발령지였고, 이곳에서 일본어를 가르쳤다.

 

2014년에는 2학년 1반 담임을 맡았다. 유 교사는 같은 해 4월15일 243명의 학생들과 들뜬 마음으로 제주행 세월호에 몸을 실었다.

 

배 안에서 하룻밤을 보낸 16일 오전 8시30분쯤 학생과 교사들은 아침을 먹거나 휴식을 취하며 수학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푸른 바다와 넘실거리는 파도를 바라보며 제주에서 보낼 일정만 생각해도 가슴이 설레였다.

 

그때였다. 세월호가 진도 해역을 지날 때쯤 오른쪽 왼쪽으로 흔들리더니 어느 새 한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졌다.

 

배 안의 집기들이 한쪽으로 몰렸고, 탑승객들도 데굴데굴 굴러 배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한 번 기울어진 배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내 넘어지더니 바다 속으로 침몰하기 시작했다.

 

배 안에서는 학생들의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오면서 '엄마' '아빠'를 애타게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학생도 있었다.

 

유니나 교사는 5층 조타실 뒤 객실에 머물고 있었는데, 탈출이 용이한 곳이었다.

 

배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유 교사도 간신히 난간을 붙잡고 몸을 지탱하며 구조대가 오기를 기다렸다.

 

바로 그때 3층에 있던 한 학생으로부터 다급하게 전화가 걸려왔다. “쌤, 여기 3층인데 00이가 다쳤어요. 도와주세요!” 학생의 전화를 받은 유 교사는 제자를 구하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3층 다인실에는 1반 학생 37명이 머물고 있었다. 유 교사는 제자들의 이름을 불렀다. 00아, 00야… 담임 선생님 목소리를 들은 학생들은 "쌤, 여기에요" 그렇게 3층 다인실에서 유 교사는 제자들은 만났다.

 

그리고 다친 학생을 포함해 반 학생들 한 명 한 명을 밖으로 탈출시키기 시작했다.

 

유 교사의 모습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다친 학생과 전화를 건 학생은 구조됐다. 단원고 2학년 10개 학급 중 1반은 19명(37명중)이 탈출해 가장 많은 학생이 생존했다.

 

학생들은 생존자 명단에서 ‘유니나 선생님’의 이름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배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다. 학생들은 ‘1반 교실’ 출입문과 창문에 실종된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메모를 붙이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애타게 기다리던 ‘쌤’의 생존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실종됐던 학생들과 교사들이 하나 둘씩 주검이 돼 돌아와도 유 교사는 어둡고 차디찬 바다 속에서 나오지 못했다.

 

기다림에 지친 학생들은 선생님의 카카오톡에 “빨리 돌아오세요” “선생님, 보고 싶어요”를 남겼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는 표시 ‘1’자는 지워질 줄 몰랐다.

 

스승의 날에 선생님을 꼭 보고 싶었던 학생들의 염원은 물거품이 됐다.

 

"보고 싶어요" "선생님 사랑해요" "빨리 나오세요"를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외쳤지만 선생님이 구조됐다는 소식, 선생님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소식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들의 기다림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그리움은 몇 배로 더 커져 하늘까지 닿았다. “유니나 선생님은 언제나 돌아오실까요?” "하나님, 제발 우리 선생님을 보내주세요!" 아이들은 수도 없이 기도했다.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그리고 세월호가 침몰된 지 54일째인 2014년 6월8일 오전 10시35분. 3층 식당 밑에서 20대 여성으로 보이는 승객이 발견됐다.

 

유니나 선생이었다. 얼굴도,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고 지문채취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생존해 있기를 기대했던 아이들의 실낱 같은 희망은 파도처럼 부서지고 유 교사는 싸늘한 시신으로 우리 곁에 왔다.

 

비록 시신의 형체는 알아 볼 수 없었지만, 부모님은 머리 형태와 반지 등을 보고 바로 딸인지 알았다.

 

유 교사는 발견 당시 갈색 파마머리에 니트와 면바지 차림이었고, 왼쪽 손가락에는 반지를 끼고 있었다. 구명조끼도 착용하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유전자(DNA) 검사를 통해 신원을 확인했다.

 

유니나 선생님은 제자들을 친동생처럼 아꼈다고 한다.

 

제자들이 남긴 글에서도 ‘교사’이기에 앞서 언니, 누나처럼 편하게 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모에게도 친구 같은 딸이었다. 어머니는 “고향에 올 때면 꼭 영화를 함께 보거나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고 전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 다닐 때 장학금도 많이 받았고, 그걸로 일본 유학을 갔다오는 등 모범생 딸이었다.

 

유 교사의 아버지는 딸의 목소리도 듣지 못한 게 못내 한으로 남았다.

 

그는 “사고 마지막까지 애들 구하겠다고 뛰어다녔을 니나 모습이 선하다. 교사로서 책임감 있는 모습이었지만, 다른 아이들처럼 문자나 전화라도 한번 해줬으면 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사고 당일 학생들을 구하느라 가족에게 마지막 문자 하나 남기지 못했던 것이다. 유니나 선생님을 비롯한 단원고 세월호 순직 교사 9명은 대전 현충원에 잠들었다.




마지막까지 제자들을 위해 살신성인한 선생님들, 이들은 참 교사였다. 비록 다시 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지만 우리들의 마음속에 순직 교사들은 '영원한 선생님'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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