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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사람들

의로운 법조인 ‘고 한기택 판사’ 이야기

by 사건추적 2020. 12. 28.


사법부가 국민 불신을 받고 있는 이 시대에 ‘고 한기택 판사’를 떠올리면서 희망을 갖는다.

 

그는 ‘가장 판사다운 판사’ ‘목숨 걸고 재판하는 판사’로 불렸던 법조인이었다. 그러나 대전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재직했던 지난 2005년 7월 해외 가족여행 중 말레이시아 코나키나발루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당시 그의 나이 46세.

 

고 한기택 판사는 비록 짧은 생을 살다갔지만 그가 남긴 발자취는 누구보다도 울림이 컸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그는 1981년 사법시험(23회)에 합격한 후 군 법무관을 거쳤다.

 

그 후 서울고법 판사, 대법원 재판연구원, 수원지법 부장판사,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 등을 역임했다.

 

법관 생활 19년 동안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세상을 바꾸는 개혁에는 언제나 앞장섰다. 1988년 ‘2차 사법파동’ 당시 김용철 대법원장의 유임에 맞서 법관들의 반대서명을 이끌었다.

 

이후 박시환 전 대법관, 강금실 전 법무장관 등과 함께 진보 성향의 판사 모임인 '우리법연구회'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판사로서 사회 소수자들이 받는 차별과 권익 보호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인권을 강조한 판결을 내렸다.

 

한 판사는 법관이 된 뒤 “목숨 걸고 재판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재판을 자신의 목숨처럼 여겼다는 뜻이다. “나는 살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내가 뭐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순간 남들이 나를 죽었다고 보건 말건 진정한 판사로서의 나의 삶이 시작될 것으로 믿습니다.”

 

 

 

아래는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이 쓴 '판사 한기택이 그립다'는 글이다.

 

법원에서 일할 때 동료 중에 사법연수원 동기생 인 한기택이라는 판사가 있었다. 내 대학교 2년 후배이다. 기택이 법무관을 마치고 나서 판사로 임관하여 막 배석판사로 법원 생활을 시작할 무렵이었던 1988년에 법원에서는

 

제2차 사법파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전국적으로 400명이 넘는 판사들이 사법 부의 독립과 자기 반성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였고, 그 결과 전두환 대통령 당시에 임명되어 유임이 점쳐지던 대법원장이 퇴임을 하였다.

 

전국을 발칵 뒤집었던 이 서명의 첫 사인은 당시 서울민사 지방법원에서 막내 배석판사로 있던 기택과 그의 가까운 친구들이 했다. 성명서의 초안도 기택이 작성했다. 나중에 기택과 그 친구들 인 K, L, Y 그리고 나는 ‘우리법연구회’라는 작은 모임에서 같이 만나 판례와 법률 세미나도 하고, 동아리처럼 사적으로도 친하게 지냈다.

가까이 지내는 동료들 가운데서도 기택은 좀 특별한 사람이었다.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뭐든 한 수 접고 들어가게 만들고, 붙잡고 만만하게 치대기도 어려웠다. 공부는 제일 잘하여 법원에 와서도 판사로서의 실력이 뛰어나서 어디 한 군데 흠잡을 데가 없었고, 재판 업무에 그냥 전념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한 몰입과 전력투구의 자세여서 모든 일의 우선 순위는 첫째도 재판, 둘째도 재판이었다.

 

동료들이 같이 술 한잔 마시자고 해도 집에 가서 일해야 한다고 빠지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해서 같이 모임을 할 때 출석률이 불성실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열정적으로 일하고, 사람을 만나되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절대로 미루거나 한 점 소홀함이 없이 치열하고 완벽하게 해내는 것, 이 미묘한 긴장의 일상을 기택은 빈틈없이 철저히 꾸려 나갔다.

 

기택은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며, 사람을 만나면 항상 미소를 지었고 그럴 때마다 양 뺨에 보조개가 살짝 패였다. 말수가 적어 조용히 구석 자리에 있는 듯하다가, 한참들 떠들고 대화와 토론이 무르익고 나면 나직나직하게 그러면서도 단호하고 선명하게 자기 의사를 표현했다.

 

항상 참으로 부드럽고 겸손하고 예의바르고 과묵했다. 한 번도 화를 내거나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내심 고등학교 시절부터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자기 인생의 목표였다고 한다. 하지만 망루에 혼자 올라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사방을 관찰하고 집중하고 긴장하는 고독자 같은 기운이 서려 있으니, 부담 없고 편안한 친구라기보다는 순도 100퍼센트의 순금으로 된 법관 그 자체의 모범 답안을 옆에 두고 경외하는 그런 관계였다고 할까.

 

기택이 언제나 그 자리에 변함없이 있다는 믿음이 형성되어, 희로애락에 시달리는 우리 모두에게 의지할 거처가 있는 듯 안도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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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택은 재판 속에 자신의 삶을 모조리 쏟아부었다. 시대의 민주화에 걸맞은 사법부의 역할과 모양새를 고민하여 사법파동의 불길을 일으킬 정도로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와 일에 대한 고민과 성찰 이 깊었고, 헌법제도로서의 법의 가치와 기능에 대하여, 사람의 소중함과 권리에 대하여 두루 최선의 답을 찾아서 재판 실무의 절차와 판결 속에서 그 완성태를 추구하고자 하였으니, 시간도 에너지도 남아날 재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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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시각 장애인들의 안마사 자격을 놓고서 시각장애인들만이 자격을 딸 수 있게 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판결이 나와 파문을 일으켰는데, 기택이 한 재판 중에는 비장애인의 직업 선택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국가가 시각 장애인의 생계를 실질적으로 보장해 주지 못하는 현실에서 국가의 보호 의무가 있으므로 이 제도를 위헌으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 있다.

 

군 복무중에 받은 구타와 가혹 행위로 정신병이 생겼다고 주장하는데, 군 복무 전후하여 다른 어떠한 정신병의 원인을 발견할 수 없다면 군 복무 중에 발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판결도 있다. 한국인과 결혼한 중국인 여성이 자녀를 만나는 것을 봉쇄하는 것은 평등권 위배이며, 혼인과 가족생활을 보호하여야 할 국가의 의무 위반이라고 한 판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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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재판 내용 자체를 내가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구체적인 사건에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람들의 이야기에 끝까지 귀를 기울이고, 헌법의 가치들을 바탕으로 해서 판결 하나하나를 실무에 어김없이 철저히 해석하여 처리하였으며, 그 판결에 이르게 된 이유에 관해서도 아주 자상하게 설명함으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과 최선 그 자체였다는 것만큼은 기택과 일한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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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을 용서하지 않아서 가족에게 관용차를 단 한 번도 태워주지 않았다고 하고, 주 위 사람들에게 법률 자문을 해주는 것도 판사의 도리에 어긋난다고 거절하였다. 사람으로서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완벽을 추구 하는데, 그 완벽의 기준이 절대선과 진리에 닿아 있는 사람. 기택은 일종의 그런 사람이었고 그 진리를 향한 과정에서 그침 없이 자기를 비우고 겸허해지다 보니 항상 자세를 낮추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냥하였다.

기택은 사랑에서도 ‘완전한 사랑’을 하였다. 세상에 완전한 사랑이 있고 또 그렇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주위 사람들 에게 가르쳐 주었다. 기택이 군대에 있는 동안 연인인 상연 씨와 천 통이 넘는 연서를 주고받은 것은 유명한 일화이며, 아이를 셋 낳아 대학생이 되도록 그들은 떨어져 있으면 하루도 빠짐없이 날마다 서로 전화하고 상대를 그리워하고 속삭였다.

그런 기택이,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가치의 어떤 궁극의 지점을 향해 있어 으레 거기 있으려니 했던 기택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어머니와 형제들, 그 가족들, 사랑하는 상연 씨와 자녀 모두 데리고 그 집안 역사상 처음으로 전 가족 동참 말레이시아 여름 휴가 여행을 떠나 그곳 바다에서 아이와 물놀이를 하다가 파도에 휩쓸려 익사하였다.

 

그날 아침 K가 전화를 해서는 기택이가 죽었어요, 하니 나로서도 처음 맞는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이 세상에 오는 것도 우리가 만난 것도 미리 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제 홀연 떠나버리니 그 의미는 정말 알 수 없다. 다만 천재가 요절하는 이유 는 정열을 너무 짧고 지극한 순간 속에 집중하여 소진하기 때문이구나 할 뿐.

 

기택이처럼 살면 오래 살기 힘들구나, 어떻게 해야 하나, 적당히 느릿느릿 살아야 하나, 기택이처럼 치열하게 매 순간 철저하게 닿을 수 있는 이상과 완전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나. 적어도 나는, 그리고 기택을 아는 친구들, 주위 동료들은 기택이 죽은 후에 죽음 속에서 더 빛난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평소에 사교적인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가 떠나는 장례식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차마 발을 떼지 못하여 눌러앉아 있고, 매일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왠지 살아 있는 것과 죽음이 한 몸이 된 것 같은 지점에 그의 존재가 놓여 있었다.

 

이 무한한 공간과 거대한 침묵 이 나를 두렵게 한다는 파스칼의 말과 같이, 거대한 무한 속에 놓여 있는 정말로 정말로 너무 짧은 나의 생애. 어떠한 형태로든 어떠한 방식으로든 생명의 소중한 상태에 자연스럽고, 또 유한을 넘어 죽음을 넘어 존재하는 그 공간과 침묵 속에 자연스럽기를, 그러기 위해서 주어진 내 시간들 속에 언제 죽음이 온다 하더라도 남아 있는 미진함이 없이 담담하기를.

 

기택은 “모름지기 판사는 목숨을 걸고 재판을 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런 말도 남겼다. “어쨌거나 저는 수축을 거쳐 궁극적으로 소멸하는 과정에 들어갔음을 잘 알고 매일매일 생각합니다. 미구에 제가 생겨나던 때의 아주 작고, 여리고, 반면에 죄도 짓지 않았던 모습으로 되돌아가서 결국은 제가 온 곳으로 되돌아가겠지요.”




기택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2005년 2월 무렵, 동기 판사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하여 축하 모임을 할 때 였다. 그 모임이 끝나고 사람들이 노래방에 가자고 해서 같이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 기택은 나에게 속삭이듯 말하였다. 누님, 아무래도 이승은 행복한 곳이 아니에요. 저곳으로 가야지요.

 

2005년 7월 24일, 나이 46세, 판사 한기택이라는 사람, 이 세상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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