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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진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최후 생존자 3인'의 숨은 이야기

by 사건추적 2021. 11. 18.


1995년 6월29일 오후 6시쯤, 국내 최대를 자랑하던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단 20초 만에 양쪽 벽만 남긴 채 A동 5층 건물이 완전히 붕괴됐다. 

 

불법과 비리로 세워진 '현대판 바벨탑'의 예견된 참사였다. 건물이 무너지면서 쇼핑하거나 근무하고 있던 사람들 1천여 명이 순식간에 매몰됐다. 이중 502명이 희생됐고, 시신조차 찾지 못한 실종자가 6명, 부상자가 937명에 달했다. 

 

이 사고는 엄연한 인재다. 삼풍백화점은 붕괴 며칠 전부터 건물에 금이 가고 천장에서 시멘트 가루가 떨어지는 등 이상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붕괴 당일에도 심각한 조짐이 있었다. 이때 영업을 중단하고 사람들을 대피시켰다면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경영진은 영업을 강행했고 한국전쟁 이후 최대 인명피해를 야기했다. 

 

무너져내린 건물은 시루떡처럼 차곡히 쌓인 콘크리트 덩어리로 변해있었다. 그나마 구조작업 중 기적이 일어나면서 폭삭 무너진 국민들의 가슴에 '희망'이라는 두 글자를 새겨줬다. 


구조작업은 밤낮없이 계속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매몰된 시신들이 부패하기 시작했고 붕괴 현장은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야말로 죽음의 아수라장이었다. 생존자가 나올 가능성도 희박했고 구조 열기도 식어갔다. 

 

붕괴사고로 매몰된 경우 생존 가능성은 24시간 내 80%, 48시간 내 20%, 72시간 이상이면 5% 미만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최명석(남, 21세, 11일 만에 구조)

사고 발생 11일째인 7월9일 오전 7시5분쯤, A동 지상2층 매몰현장에서 굴착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지상2층 콘크리트 상판 일부가 드러나자 구조대원의 눈에 상판 아래에 있던 시신이 보였다. 

잠시 작업을 멈춘 그는 구멍 아래로 손전등을 비추자 인기척이 느껴졌다. 구조대원이 "혹시 거기 누구 있어요?"라고 외쳤고, "여기 사람 있어요"라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살아있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바로 최명석씨(남‧21)다. 



현장에 있던 사람이 모두 몰려와 구조작업을 시작했다. 구조대는 최씨가 묻힌 곳을 중심으로 두께 1m의 철근 콘크리트 더미를 뚫고 들어가 매몰 230시간여 만인 오전 8시20분쯤 무사히 구조하는데 성공했다. 최씨는 들것에 실려나오면서 손을 내젓는 등 여유를 보이기까지 했다. 

 

휴일 가정에서 TV를 시청하던 많은 국민과 붕괴현장에서 구조작업과 봉사활동을 하던 구조대원들은 인간승리, 기적의 생환 드라마를 지켜보며 환호했다. 


최씨의 극적인 생환소식은 절망감에 빠져 있던 실종자 가족들에게 마지막 희망을 불어넣었다. 이때부터 중장비 작업이 중단되고 추가 생존자가 더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 


수원전문대 건축설비학과 2년을 다니다 휴학한 최씨는 삼풍백화점 A동 지하1층 수입 신발코너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최씨는 붕괴직전 친구가 찾아오자 지하3층 직원식당에서 간식을 먹었다. 이어 지하1층으로 올라가던 중 순식간에 바닥이 꺼지고 천장이 내려앉았다. 

 

천만다행으로 건물이 엇갈리게 무너지면서 최씨는 에스컬레이터와 콘크리트 상판사이에 생긴 높이 1.2m, 너비 1.5m쯤의 삼각형 공간에 갇혔다. 정신을 차려보니 새까만 어둠속이었다.

 

그때 왼쪽 옆으로 가로막힌 콘크리트더미 너머에서 여자들의 신음이 들려왔다. 애타게 “살려달라”며 절규하고 있었다. 

 

최씨는 반가움에 말을 걸었다. 한 명은 지하1층 주방용품 코너에서 일하던 백화점 직원 이승연씨(여‧25)였다. 한 명은 이름모를 아주머니 고객이었는데 가슴 부분이 콘크리트더미에 깔려 거의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힘겹게 “내 딸이 올해 서른이 됐다”고 말했다. 셋은 “꼭 살아서 나가자”며 서로에게 위안이 됐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승연씨는 "먼저 갈 것 같아. 우리 가족들에게 소식 좀 전해줘…"라는 말을 남기고 숨소리가 끊겼다. 두 사람이 숨진 뒤 죽음의 공포가 밀려왔다. 



심한 갈증을 느낄 때 갑자기 머리 위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입을 벌려 받아먹고 나니 살 것 같았다. 허기가 밀려와 주변을 손으로 더듬어보니 종이상자가 잡혔다. 최씨는 종이조각을 찢어 물에 불린 후 조금씩 먹으면서 배를 채우다가 가까스로 살아났다. 

유지환(여, 18세, 13일 만에 구조)

유지환양(18)은 서울 인수중학교 졸업 후 가정형편을 고려해 위례상고(현 동산정보산업고)에 입학했다. 졸업 전인 1994년 10월 가정용유리제품을 만드는 삼광유리공업에 입사했다. 이때부터 삼풍백화점 A동 지하1층 크리스털매장의 직원으로 근무해왔다. 


붕괴 직전인 오후 5시50분쯤, 평소보다 조금 일찍 간식을 먹고 지하1층 매장에 들어왔다. 에어컨 가동이 안 돼 매장 안은 몹시 더웠다. 

 

일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매장 언니가 "뛰어"라고 소리쳤다. 지하1층 가정용품 코너쪽을 통해 건물 밖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주위가 깜깜해졌다.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동안에 유리와 돌조각 등 각종 파편이 날아왔고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콘크리트더미에 매몰돼 주변은 온통 암흑천지였다. 다행히 매몰되면서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매몰 공간은 길이가 130cm 정도였는데, 고개를 좌우로 돌릴 수 있었고 양팔을 뻗을 수 있을 정도였다. 유양은 다리를 구부린 상태에서 등을 바닥에 대고 반듯이 누워있었다. 

 

처음에는 마구 소리를 질렀다. 누군가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손을 조금 움직이며 콘크리트와 철판을 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후 자다가 깨다가를 반복했다. 빗물이 흘러내리자 담요를 적셔 입술에 대는 것으로 갈증을 달랬다. 

 

며칠이 지났을까. 굴착기가 찍어내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곧 구조된다는 희망이 생겼다. 하지만 굴착기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두려움이 엄습했다. 

 

유양이 갇혀 있던 공간은 천장과 얼굴과의 거리가 약 30cm 정도였다. 굴착기가 작업하면서 천장 높이가 점점 낮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다 깔려 죽는 게 아닌가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사고 발생 13일째인 7월12일 오후 1시47분쯤, 굴착기 작업도중 주먹 만한 구멍에서 물체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구조대원은 곧바로 작업을 중지시키고 구멍 속을 내려다보니 발톱에 매니큐어가 칠해진 사람의 발이 보였다. 그가 구멍 속을 향해 "살아 있으면 발을 움직여 보라"고 외치자 발이 꿈틀거렸고 “살려주세요”라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렇게해서 유지환양은 매몰 13일(285시간) 만에 극적으로 살아났다. 구조되는 순간에는 천장이 거의 코에 닿을 정도로 낮아져 있어 아찔했다. 구조 직후 소감을 묻자 "구조대원 오빠랑 데이트하고 싶다“고 하는 등 유쾌한 모습을 보여 화제가 됐다. 

박승현(여, 19세, 15 만에 구조)

박승현양(19)은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 있는 성덕여상을 졸업했다. 3학년 때인 1994년 10월 학교 추천으로 삼풍백화점에서 넉 달 정도 실습을 받았다. 취업 면담 때 사무직보다는 활동적이고 사교적인 직장을 원해 삼풍백화점에 추천됐다. 1995년 2월 정식으로 채용된 후에는 지하1층 아동복매장 계산대에서 근무했다.

 

붕괴 당일은 원래는 비번이었는데 동료 언니가 바꿔달라고 해서 대신 근무했다. 오후 5시55분쯤 지하 3층 직원 식당에서 일찍 밥을 먹고 지하 1층 매장으로 올라왔다. 이때 어디선가 '휭휭'하며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사방이 캄캄해졌다. 

 

곧이어 '쾅쾅'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바닥이 꺼지는 느낌을 받았다. 박양은 같이 근무하는 언니와 함께 한 발 자국도 못 움직이고 아래로 떨어졌다. 

 

떨어지면서 물탱크 같은 쇠붙이에 머리를 부딪친 느낌이 들었다. 머리에 피가 흘렀지만 상처는 심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누워서 옆으로 굴러다닐 수 있을 만큼 공간이 컸다. 천장까지 약 50cm 떨어져 있었다. 

 

발을 쭉 뻗어도 벽에 닿지 않을만큼 공간은 길었다. 손을 더듬어보니 아동복 매장의 배냇저고리, 손수건만한 어린이 웃옷 등이 바닥 곳곳에 널려 있었다. 

 

매몰 당시 여기저기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누구 없어요“ 목이 터져라 외치자 가까운데서 ”살려주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함께 추락한 언니였고, 콘크리트더미에 허리가 깔려있다고 했다. 

 

상황이 다급했는지 연신 "꺼내줘" "승현아 승현아 살려줘"라고 소리쳤다. 박양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옆 공간이라 도울 방법이 없었다. 하루쯤 지나자 소리가 희미해지더니 곧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밖으로 나가려고 돌더미를 밀어보기도 하고 두드리기도 했다. 소리도 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타는 듯 목이 말랐다. 물을 먹고 싶었는데 녹물이어서 차마 먹지 못했다. 대신 녹물을 머리에 적시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구조대원이 곧 올 것이라고 믿고 그 사이 편히 누워 잠이나 자 두자고 생각했다. 주변에 널려 있는 옷가지를 몇 장 모아 베개로 삼고 잠을 청했다. 

 

잠들었다 깼다를 되풀이 했지만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사이 양쪽 벽이 점점 좁혀져 오기 시작했다. 콘크리트 더미가 어깨까지 닿아 상처를 입기도 했다. 공간이 좁아 누워 있을 수도 없었다. 혼자라는 두려움, 어둠의 공포, 또다시 천장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쉴새없이 밀려왔다. 

 

이때 어디선가 '쿵쿵'하며 땅 파는 소리와 구조대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머리 위쪽에서 환한 빛줄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안에 누구 있어요."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니 손바닥 만한 구멍 너머로 구조대원의 옷자락이 비쳤다. 박양은 있는 힘을 다해 ”살려주세요. 사람이 있어요“라고 소리 질렀다. 

 

7월15일 오전 11시15분쯤, 박양은 15일(377시간) 만에 구조되면서 또 한 번의 기적적인 생환드라마를 연출했다. 국내 최장 극한상황에서의 생존기록도 깼다. 



이전에는 1967년 8월 충남 청양군 구봉광산에서 매몰됐던 양창선씨(당시 37세)가 15일 9시간만에 구조됐었다. 박양은 이보다 8시간45분이나 더 버텼다. 탈수증세와 대퇴부에 약간의 찰과상을 입은 것외에 건강은 양호한 편이었다. 

 

놀라운 것은 매몰 기간동안 물 한 모금 먹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대해 의료진은 ”젊고 피하지방층이 두터운 여성이어서 물 없이도 생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면서도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미스터리’라는 반응을 보였다.

 

사고 1년 후 븡괴현장을 찾은 생존자 3인(왼족부터 유지환양, 최명석씨, 박승현양), 사진=시사저널

생존 이후, 세 사람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온 최후의 3인. 이후 이들은 어떻게 지냈을까. 세 사람은 이 일을 계기로 가까워졌고 자주 연락을 주고 받으며 교류했다고 한다. 

 

이들의 상처는 완전히 아문 것이 아니었다. 가슴속에는 깊은 상처가 남았다. 지하철을 타거나 공사구역을 지날 때는 불안해 가슴이 쿵쾅거리고, 밤에는 악몽에 시달렸다. 

 

그래도 자신들이 살아나온 붕괴 현장을 잊지 않았다. 각자 몇 번씩은 이곳을 찾았다. 그때마다 콘크리트 천장과 벽이 내려앉던 그 순간이 영화 장면처럼 떠오르고, 죽어간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해 빠지곤 했다.

 

최명석씨는 대학을 졸업한 뒤 곧바로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LG건설(현 GS건설) 측이 특례보충역 편입이 가능한 산업기능요원 선발을 제의했지만 과감히 뿌리쳤다. 그는 "어차피 죽었다 다시 살아난 목숨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사나이답게 가장 힘들다는 해병대를 택했다“며 지원 이유를 밝혔다. 

 

2001년 제대한 그는 GS건설에 특별채용됐다. 최씨의 생존이 알려진 후 GS건설은 그를 각별히 챙겼다. 병원을 방문해 위로금을 전달하고 졸업 후 취업보장 등을 약속했었다. 최씨는 박승현씨의 고교 동창을 소개받아 교제하다가 2005년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유지환양은 사고 전 다니던 삼광유리에 계속 다녔다. 회사측은 유양이 생존한 후 평생사원을 약속하는 등 각별히 챙겼다. 

 

배움에 대한 열망이 식지 않았던 유양은 모교인 위례상고 재단이 해외 유학을 제의하자 회사를 그만두고 1996년 10월 호주로 유학을 떠났다. 학교 재단에서 유학 편의까지 제공했다. 1999년 귀국한 후 서울 강남의 인력알선업체에 2년 넘게 다니다가 2002년 결혼한 후 경기 의정부에서 살았다.



박승현양은 1996년 2월 근로복지공단에 특채됐다.

 

박양은 ‘삼풍 참사 생존자'라는 것이 꼬리표처럼 붙어다니면서 TV방송 프로그램 등에 불려다녀야 했고, 그때마다 사고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살아남은 자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결국 2000년에 그만뒀다. 이후에는 언론 노출 등을 피하며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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