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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진실

서진룸살롱 살인사건 '사형수 고금석'의 옥중 순애보

by 사건추적 2022. 5. 5.


고금석은 전남 신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낙도 초등학교 교감선생님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부모님께 문안 인사를 할 정도로 예절 바른 아이였다. 동네에서도 ‘착한 아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술 취해서 길바닥에 쓰러져서 있는 어른들을 일일이 업어서 집에 모셔다 줄 정도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용인에 있는 유도대학에 입학했다. 

서울에서 자취를 했는데, 고향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친구가 가담했던 폭력조직(서울 목포파)에 들어갔다.

6개월 후인 1986년 8월14일 고금석은 ‘서진 룸살롱 살인사건’에 휘말린다. 그가 속한 서울 목포파가 상대 조직인 맘보파의 조직원 4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서울 목포파 13명 중 2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그중 한 명이 고금석이다. 

 

고씨는 미결수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사형수의 아버지’로 불리는 박삼중 스님을 만나 불교에 귀의한다. 그는 남의 목숨을 빼앗은 몸이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없다며 하루 한끼를 먹고 자신의 식사는 다른 재소자에게 줬다. 

자신의 영치금을 털어 출산한 여성 재소자에게 우유와 기저귓감을 주기도 하고, 불우한 사람들에게 성금으로 보내줬다. 그는 또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삼천배를 했다. 자신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을 위해 천 일 동안 기도하며 참회했다.



동료 사형수가 후원해 오던 곳을 이어받아 오지학교인 강원도 정선군 백전국교 용소분교 아이들의 후원자가 됐다. 고금석은 자신의 영치금을 털어 매달 학용품을 사보냈다. 

 

그곳의 아이들은 고금석을 ‘키다리 아저씨’로 불렀다. 용서분교 교감선생님은 아이들에게 ‘키다리 아저씨’가 사형수라는 사실을 숨겼다. 

이런 고금석을 사랑한 소꿉친구인 윤아무개씨가 있었다. 고금석의 첫사랑인 그녀는 함께 초등학교를 다녔고, 고씨의 아버지가 윤씨의 담임을 맡기도 했다. 

 

윤씨는 고금석이 수감되자 매일 면회를 왔다. 그녀는 사형수 고금석에게 그녀가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바쳤다. 처음에는 구명을 호소했지만 그게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는 옥중 결혼을 청하며 사형수의 아내가 되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사형수는 ‘미결수’이기에 ‘기결수’에게 허용되는 결혼도 불가능했다. 

기독교 신자였던 윤씨는 어느 날 삼중스님에게 불교로 개종해 비구니가 되겠다고 말한다. 평생 고금석의 명복을 빌며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이 말을 전해들은 고금석은 윤씨의 면회를 거부한다. 

그는 부모 없이 외롭게 자란 윤씨가 감옥이 곧 무덤인 자신 때문에 불행해지지 말고 자신을 잊게 해 달라고 삼중스님에게 부탁했다. 억지로 사랑을 끊어버린 것이다. 이후에도 윤씨는 계속해서 면회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89년 8월4일 오전 고금석의 사형집행이 있는 날이다. 서울구치소 관계자, 서울지검 검사, 검사시보 등 20여명이 입회했다. 고금석은 삼중스님을 보자 태연히 미소를 지으며 오체투지(이마·양 팔꿈치·양 무릎이 땅에 닿는 절) 큰절을 세 번했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불효의 죄 씻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진리와 더불어 뜨겁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습니다. 짧은 생을 살다 가지만 보람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종교행사가 시작되자 삼중스님은 “죽음은 없는 것이다. 죽음이란 마음이 육체라는 누더기를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이사가는 것이다. 웃으며 가라”고 말했다.


고금석은 “압니다, 스님. 그런데 부탁이 있습니다. 8월14일은 제가 희생시킨 사람들의 천일 지장기도 회향일 입니다. 제 대신 기도를 끝내주십시오. 그리고 00(첫사랑)를 잘 돌봐 주십시오. 00를 진정 사랑했습니다”라며 마지막 가는 심경을 밝혔다. 

비록 사랑하는 사람의 미래를 위해 억지로 정을 끊었지만, 가슴속에서까지 떨쳐 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고금석은 다시 “강원도 산골아이들 잔치 잘 돌봐 주세요. 스님 건강하시고 불행한 사람 많이 구제해주세요”하고는 사형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얼굴에 포장이 씌어졌고 밧줄이 목에 걸렸다. 그는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지장보살을 계속 외쳤고 전기작동으로 버튼이 눌러졌다. 삼중스님에 따르면 이튿날 인수한 고금석의 시신은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고금석은 죽기 전 교도소 측에 눈과 콩팥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근데 사형 당시 휴가철이라고 의사와 약속이 되지 않아 기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날 오후 윤씨는 평소처럼 고금석의 면회를 신청했고, 교도관에게 “오늘 아침에 사형이 집행됐다”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오열했다. 

 

고금석의 사형집행 후 산골 분교에 야외 교실이 지어졌다. 고금석이 죽기 전에 남은 영치금을 모아서 지어준 것이었다. 야외 교실은 고금석의 법명인 ‘금송’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아쉽게도 용소분교는 힉생수 감소로 2008년 통폐합돼 없어졌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죽어야 했으나 죽음 앞에서는 거룩하게 살았던 25살 청년의 마지막 흔적은 그렇게 세상에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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